돈가스
같이 일하는 동료가 말하기를, 화실 건너편에 있는 카페에서 '돈가스'라는 것을 파는데 아주 맛있다고 했다. 그리고 서빙하는 아가씨들이 무척 예쁘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아주 맛있다는 '돈가스'라는 것이 궁금했지만 실은 아가씨들이 예쁘다는 말에 더 관심이 갔다. 그곳은 낮에는 식사를, 밤에는 술까지 파는 곳이었다.
내부엔 원탁 테이블 몇 개와 긴 소파로 된 공간이 있었는데 어두웠다. 원탁 테이블이 있는 의자에 앉았는데 너무 푹신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종업원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메뉴판을 가지고 왔다. 동료 말이 생각나 슬쩍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또래로 보였고 정말 예뻤다. 떨리는 목소리로 '돈가스'를 주문했다. 아직까지 못 고친 버릇 중 하나가 예쁜 아가씨와 말을 하면 목소리가 떨리게 나온다는 것이다. 아가씨는 그런 나를 슬쩍 한 번 보고는 다시 메뉴판을 들고 갔다.
식사가 나오는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맞은편 테이블에서 식사하고 있는 두 사람뿐이었다. 점심때가 지난 시간이라 생각보다 한가했다.
이번엔 다른 아가씨가 오더니 종이를 깔고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역시 예뻤고 또 떨린 목소리로 고맙다고 했다. 조금 있으니 먼저 흰 사기그릇에 담긴 수프가 나왔다. 이것도 처음 먹어보는 것이다.
소금을 넣고 후추를 넣는데 그만 후추가 너무 많이 나와 버렸다. 누가 보지는 않았을까 하며 슬쩍 한 번 둘러보고는 스푼으로 휘휘 저은 뒤 한술 떠 입으로 가져갔다. 비록 후추 범벅인 수프였지만, 인스턴트 수프와 달리 고소했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 남김없이 먹었다. 물론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윽고 주 메뉴인 '돈가스'가 나왔다. "맛있게 드세요"라는 아가씨 말과 함께 구수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드라마에서 '썰러 가자'고 표현하던 바로 그 양식이었다. 넓은 접시 위엔 옥수수와 마카로니, 삶은 콩이 한쪽에 있었고 잘게 썬 양배추가 마요네즈와 토마토케첩에 섞여 있었다. 접시 가운데엔 갈색 튀김옷을 입은 돈가스가 황토색 진한 소스에 덮여 있었다.
왼손엔 포크, 오른손엔 나이프를 들었다. 젓가락과 숟가락에만 익숙했던 손이라 영 어색했다. 막 칼질을 하려는데, 드라마에서 고기를 썰다가 실수해서 고기가 튀어 무안당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예쁜 종업원 아가씨들이 보는 데서 만약 그런 실수를 한다면 "쟤, 처음이구나"하며 웃을 생각을 하니 괜한 신경이 쓰였다.
요즘이야 힘들게 썰 필요 없이 부드럽고 또 먹기 좋게 미리 썰어져 나오기도 하지만, 그때 '돈가스'는 대부분 딱딱했다.
마치 톱으로 나무를 자르듯 열심히 칼질을 한 끝에 드디어 고기를 잘랐다. 그걸 포크로 집어 양념을 한 번 더 묻히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바삭거리는 소리와 더불어 오물오물 씹고 있자니, 순간 감탄사가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이런 기가 막힌 맛이라니…. 동료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이번엔 하얀 쌀밥을 포크로 떠서 입안에 넣은 뒤 노란 단무지 하나를 살짝 베어 물고 다시 내려놓았다. 입은 오물거리며 열심히 칼질을 했다. 잘 썰어지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꽤 재미가 있었다. 이번에도 힘들게 한 조각 떼어낸 후 입에 넣었다. 씹히는 맛과 고소한 맛이 어우러져 참으로 즐거웠다. 옥수수, 마카로니, 콩, 양배추 등 곁들여 나온 것까지 남김없이 다 먹었다.
다음날 난 또 그 카페로 향했다. 종업원 아가씨가 메뉴판을 내밀기도 전에 "돈가스요"하고 주문했다. 이번에는 수프에 후추를 쏟는 실수를 하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다음날, 또 그 다음날도 '돈가스'를 먹으러 그 카페로 향했다.
매일 오는 내가 이상했던지 신기한 듯이 쳐다보는 종업원 아가씨들 눈빛이 느껴졌다. 그 달치 원고료를 매일 '돈가스'를 먹는 데 써버릴 만큼 처음 경험한 외식은 내겐 중독 그 자체였다.
허영만 화백의 작품 <식객>에 이런 글이 있다. "음식엔 맛이 있어야 한다. 음식엔 멋이 있어야 한다. 음식엔 품위가 있어야 한다. 음식엔 클라이맥스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도박이 있으면 안 된다!"
생각하니 난 도박하듯 음식을 즐겼던 것이다.
화실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가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새로 생긴 '돈가스'집이 나왔다. '돈가스'를 여전히 즐겼지만, 이번엔 일주일에 한 번으로 바뀌었다. 대신 혼자 먹으러 다니던 것이 동료 3명으로 늘어났다. 내 '돈가스' 예찬에 동조한 친구들이었다.
그곳에선 특이하게 반달 모양 단무지가 아닌 긴 나무토막 모양의 단무지, 더구나 색깔도 무처럼 하얀색 단무지가 나왔다. 그리고 특이하게 된장국도 같이 나왔다. 그때가 일본 된장국인 미소시루를 처음 맛본 날이기도 했다. 집에서 주로 먹던 색깔이 진한 된장국이 아니라 엷은 색 된장국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먹던 '돈가스'가 무슨 특별한 날에 먹는 것으로 바뀌더니 지금도 변함이 없다. 누구에게나 흔한 음식이 돼버린 '돈가스', 내겐 아직도 특별한 날에만 먹는 외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