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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이야기

육군 병장, 사회의 쓴맛보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겨울이었다. 시골인 집에 내려가긴 뭐해서 친구가 자취하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는데 그것도 슬슬 눈치가 보이던 참이었다. 무엇보다 힘든 건 돈 문제였다. 돈이 없으니 행동반경도 좁아지고 뭔 일을 하려해도 할 수가 없었다.

자주 어울리던 군대 선임과 동기 그리고 나는 그때까지 딱히 하는 일이 없어 직업을 구할 때까지 만이라도 아르바이트를 해보기로 했다. 생활정보지를 뒤적이며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봤지만 일이란 게 그런 것인지 딱 맞는 일은 없었다. 사람이 뭔가 여유가 있어야 차근차근 일도 살펴보고 할 텐데 급하니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그러다 떡 아르바이트가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이게 수입도 꽤 짭짤하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것도 같아 한번 가보기나 하자며 나섰다.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가 보이는 주택가에 떡을 공급해주는 사무실이 있었다. 떡은 한 판에 4만 8천 원인데 다 팔면 10만 원쯤 번다고 했다. 사무실 사장은 장사가 아주 잘된다며 어떤 사람은 한 시간 만에 다 팔고 또 가져간다고 침을 튀겨가며 자랑했다. 

사장 말을 다 믿지는 않더라도 몇 시간 만에 이걸 판다면 5만 원이라는 꽤 짭짤한 수입이 생기고, 더불어 낮에는 다른 일도 할 수 있으니 더없이 좋았다. 우린 들떠 전재산이다시피 한 돈을 모아 떡 한판을 샀다. 그렇게 해서 떡을 들쳐 멘 우리는 호기 좋게 밤거리로 나섰다. 먼저 사람이 많이 사는 아파트 단지로 갔다.
물론부자동네에서 이런 걸 사먹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추억도 있고, 또는 재미로라도 사먹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뭐, 잘된다면 이걸로 나가도 괜찮을 거란 생각도 내심 있었다.

"찹쌀~떡~ 메밀~묵~."

그러나 그렇게 외친 건 군대 선임이었다. 

"자식들이 빠져가지구. 야, 니들도 같이 소리 질러야지."
군대였다면 선임이 춤을 추라면 췄을 텐데, 막상 제대하고 나니까 그 무섭던 선임말도 잘 들리지 않았다. 군에 있을 땐 없던 용기도 쥐어짜곤 했는데, 막상 사회에 나오니까 그런 용기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역시 사회물을 1년 먹은 사람이 다르긴 다르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거리가 어두웠더라면 어둠을 핑계 삼아 소리라도 질러볼 텐데, 아파트 단지라 환해서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혼자 소리 지르다시피 하는 선임 보기가 그래서 마음 먹고 "메밀~묵~"하고 소리를 지르려 목을 가다듬으려 할 때였다.
예쁜 아가씨가 지나가는 게 아닌가. 아가씨가 나를 쳐다보자 얼굴이 화끈거려 준비하던 목소리는 다시 속으로 쏙 들어가고 말았다.

선임이 제일 크게 소리 지르고, 다음엔 동기가 모기 만한 소리로 "메밀~묵~"하며 돌아다녔다. 나는 그때까지도 머리만 긁적이며 선임 뒤만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를 돌아다녔을까. "여기 메밀묵이요"하는 말이 들렸다.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소년이 오고 있었다.
할아버지 심부름이라고 했다. 그래, 역시 추억이 먹히는구나. 처음 개시도 했으니 이제 장사가 되겠다고 좋아했다. 가져온 떡이 다 팔린다면 나도 용기가 생길 것 같았다.

조금 있다 어떤 아저씨가 찹쌀떡 묶음 두 개를 사갔다. 신났다. 두어 시간 지나 메밀묵 하나와 찹쌀떡 묶음 두 개가 팔렸다. 처음 생각보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초보치고는 괜찮은 거라고 위로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고스란히 남은 떡. 이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몇 시간 전만해도 다 팔린다는 생각에 들떠있었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고 할까.

이제 이걸 어떡할까 고민하는데 선임이 아까 메밀묵과 떡 판돈은 자기가 갖겠다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그래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막상 그렇게 말을 꺼내니 조금 얄미웠다. 그러나 나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남은 떡은 서로 공평하게 나눴고 난 친구 자취방으로 떡을 가져와 다음날까지 물리도록 먹었다.